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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성 (상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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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문성(宇文盛)은 북주의 무장으로, 선비족 우문부 출신이다. 우문태의 휘하에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조귀의 우문호 암살 모의를 고발하여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토욕혼을 격퇴하고 연주총관을 역임했으며, 북제와의 전투에서도 활약했다. 선제가 즉위한 후 상주국에 올랐으며, 대상 연간에 사망했다.

2. 생애

우문성은 선비족 우문부(宇文部) 출신으로, 본래 성씨는 파야두(破野頭)였으나 주인의 성을 따라 우문씨(宇文氏)로 바꾸었다. 그는 우문태(宇文泰) 휘하에서 군 경력을 시작하여 후막진열(侯莫陳悅) 토벌에 공을 세우고 위열장군(威烈將軍)과 어양현자(漁陽縣子)에 봉해졌다.

537년에는 두태(竇泰) 토벌과 사원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도독(都督), 평원장군(平遠將軍), 보병교위(歩兵校尉)에 임명되고 작위(公)으로 올랐다. 이후 풍익태수(馮翊太守)를 비롯하여 수도독(帥都督), 대도독(大都督),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염주자사(鹽州刺史)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다.

557년, 초국공(楚國公) 조귀(趙貴)의 우문호(宇文護) 암살 모의를 밀고하여 조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공으로 대장군(大將軍)과 건충군공(建忠郡公)에 봉해졌다. 이후 하란상(賀蘭祥)과 함께 토욕혼(吐谷渾)의 침입을 막아내고 연주총관(延州總管)과 주국(柱國)의 지위에 올랐다.

570년에는 중앙으로 들어가 대종백(大宗伯)이 되었고, 이듬해 북제(北齊)와의 전투에 참전하여 분주(汾州)에 식량을 운반하고 요양(姚襄)에서 단소(段韶)의 군대를 격퇴하는 등 활약했다. 573년에는 소사(少師)에 임명되었고, 576년 무제의 북제 정벌에 참여하여 보기(歩騎) 1만 명을 이끌고 분수(汾水)를 지켰다.

선제 즉위 후 상주국(上柱國)에 올랐으며, 대상(大象) 연간인 580년에 사망했다.[1] 아들 우문술(宇文述)이 뒤를 이었다.

2. 1. 초기 활동

우문성의 선조는 선비족 우문부(宇文部)의 대인(大人)인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의 노복으로, 본래 성씨는 파야두(破野頭)씨였으나 주인의 성을 따라 우문씨(宇文氏)로 바꾸었다. 우문성은 우문태(宇文泰)의 막하로 들어가 후막진열(侯莫陳悅)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위열장군(威烈將軍)에 임명되었고, 어양현자(漁陽縣子)에 봉해졌다.

537년, 도독(都督)을 겸하게 되었고, 두태(竇泰)를 토벌하는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사원의 전투에서 홍농(弘農)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도독(都督), 평원장군(平遠將軍), 보병교위(歩兵校尉)에 임명되었으며, 작위(公)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풍익태수(馮翊太守)를 지냈으며, 수도독(帥都督), 서안주대중정(西安州大中正),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무군장군(撫軍將軍) 등의 관직이 더해졌다. 또한 대도독(大都督),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염주자사(鹽州刺史) 등으로 거듭 승진하였다.

557년, 초국공(楚國公) 조귀(趙貴)가 우문호(宇文護)를 살해하려는 모의를 하자 이를 밀고하여 조귀는 죽임을 당했으며, 우문성은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고 건충군공(建忠郡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후 하란상(賀蘭祥)과 함께 조양(洮陽)과 홍화(洪和)를 공격해 온 토욕혼(吐谷渾) 군대를 막는 데 공을 세워 연주총관(延州總管)에 임명되었고, 지위는 주국(柱國)으로 올랐다.

2. 2. 북주 건국 이후

557년, 초국공(楚國公) 조귀(趙貴)가 우문호(宇文護)를 살해하려 한다고 밀고했다. 이 밀고로 조귀가 처형되자, 우문성은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고 작위는 건충군공(建忠郡公)으로 변경되었다.[1] 이후 하란상(賀蘭祥)과 함께 조양(洮陽)과 홍화(洪和)를 공격해 온 토욕혼(吐谷渾)의 군대를 막는 공을 세워 연주총관(延州總管)으로 임명되었고, 주국(柱國)으로 승진했다.

570년(천화 5년) 4월, 대종백(大宗伯)이 되어 중앙으로 들어갔다. 571년에는 제국공(濟國公) 우문헌(宇文憲)의 휘하에서 북제(北齊)를 공격했다. 이때 분주(汾州)가 북제 군에게 오랫동안 포위되자, 우문성은 우문헌의 명을 받아 분주에 식량을 운반했다. 이후 요양(姚襄)에서 북제의 단소(段韶)가 이끄는 대군과 마주치자 분전하여 이를 물리쳤다. 단소가 철수하자 우문성은 대녕성(大寧城)을 쌓고 귀환했다.

573년(건덕 2년) 소사(少師)에 임명되었다. 576년(건덕 5년) 무제(武帝)의 지휘 하에 북제를 공격할 때, 보기(歩騎) 10,000명을 이끌고 분수(汾水)를 지켰다.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상주국(上柱國) 지위를 받았다. 대상(大象) 연간[1](58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우문술(宇文述)이 뒤를 이었다.

2. 3. 북제와의 전투

570년 (천화 5년) 4월, 우문성은 중앙 관직인 대종백(大宗伯)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571년, 제국공(濟國公) 우문헌(宇文憲)의 지휘 아래 북제(北齊)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여했다. 당시 북주의 군대는 분주(汾州)를 오랫동안 포위 공격하여 지쳐 있었는데, 우문성은 우문헌의 명을 받아 분주에 식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요양(姚襄)으로 이동했을 때, 북제의 명장 단소(段韶)가 이끄는 대군과 마주쳤다. 우문성은 이 전투에서 분전하여 단소의 군대를 물리쳤다. 전투 후에는 대녕성(大寧城)을 새로 쌓고 돌아왔다.

576년 (건덕 5년), 무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제를 공격할 때, 우문성은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분수(汾水)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2. 4. 사망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상주국(上柱國)의 지위를 받았다.[1] 대상(大象) 연간인 580년에 사망했다. 아들 우문술(宇文述)이 뒤를 이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주요 정보
증조부우문이여돈(宇文伊與敦)옥야진군주(沃野鎭軍主)
조부우문장수(宇文長壽)옥야진군주
아버지우문문고(宇文文孤)옥야진군주
동생우문구(宇文丘)513년 ~ 572년, 주국(柱國), 의안공(安義公)
장남우문귀(宇文歸)
차남우문술(宇文述)547년 ~ 617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좌익의대장군(左翊衞大將軍), 광록대부(光祿大夫), 허공(許公), 시호 공(恭)
3남우문정(宇文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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